정광훈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이 지난달 26일의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끝내 세상을 떠났다. 정 고문은 사고로 심각한 외상을 입었으나 한 때 의식을 회복하는 등 호전 조짐을 보였으나 끝내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13일 저녁 운명했다.

정광훈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정광훈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ⓒ민중의소리 이재진 기자

노동자에게 사랑받은 농민운동가

1939년 전남에서 태어난 정 고문은 농민 출신으로 노동자, 청년학생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은 보기 드문 민중운동의 지도자였다. 정 고문은 목포 공고를 졸업하고 1969년 해남읍에서 전파상을 차려 생활하다가 사회 봉사활동에 이어 1970년대 ‘크리스찬 아카데미’ 활동에 참여함으로서 민중운동의 길을 시작했다.

정 고문은 1977년 김남주 시인 등과 함께 해남농민회를 결성했고, 1978년 전남기독교농민회 활동을 거쳐 1989년에는 전국농민운동연합을 결성해 부의장을 맡았으며, 1999년 전국농민회총연맹(전농) 의장에 선출됐다. 정 고문의 전농 의장 선출은 전농이 민주노동당에 힘을 보태는 데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.

정 고문은 2003년 민주노총, 전빈련, 전농 등 대중조직과 정치·사회단체 등 40여 개 조직이 참여해 결성된 전국민중연대 상임대표를 맡아 지역과 부문을 뛰어넘는 전선운동을 이끌었다.

정 고문은 평소 “우리의 개인이나 조직은 전국운동을 하는 것이지 부문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”라는 신념으로 “‘구멍가게’라 할 수 있는 자기조직의 손익분기점만 넘으면 연대연합에 큰 관심이 없고 당위적으로만 연대”하는 모습을 강하게 비판해왔다. 그는 “자기 조직 본위적 사고는 변혁적 관점이 아니며 ‘위대한 과업’을 담당한 간부의 모습이 아니”라고 역설했었다.

정 고문의 이러한 사고와 실천은 그가 농민운동가 출신으로 그 누구보다 노동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전선의 지도자로 서게 된 이유였다.

“혁명가는 고정자산의 비율이 높으면 안 된다.”

정 고문은 평생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운동가였다. 정 고문은 해남에서 난청 지역 해소를 위해 산꼭대기에 무허가 중계소를 설치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은 이래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.

특히 1992년에는 UR반대 등으로 4년간 옥고를 치렀다. 그러나 정 고문은 이 시기에 ‘자본론’을 통독하는 등 “전술과 전략에 있어서 공부를 많이 한” 때로 기억했다. 정 고문은 2007년 칠순을 앞두고 겪은 수감 생활에 대해서도 “채소와 김치, 보리밥으로 구성된 식단이 딱 내 입맛”이고, “다른 재소자들과 배드민턴을 함께 친 즐거운 시간”이라고 말하면서 특유의 낙관을 보여줬다.

정 고문은 생활에서도 청빈을 고수했다. 정 고문은 집 없고 땅 없고 돈 없는 생활을 자랑으로 여겼다. 서울에서 민중운동단체의 대표를 맡으면서도 해남에서 틈틈이 농사를 지었던 정 고문은 그러나 자기 집이 없었다. 1999년 전농 의장 선출 이후 11년간 객지 생활을 하면서 정 고문은 농민회 사무실 등에서 지냈고, 2010년 해남으로 돌아가면서도 후배들이 ‘집을 사라’고 모아준 돈을 모두 동지들에게 나누어 줬다.

정 고문은 평소 “혁명가는 고정자산의 비율이 높으면 안 된다.”며 운동가로서의 삶이 ‘가진 것’에 대한 미련으로 왜곡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.

해남으로 돌아온 정광훈 고문 해남으로 돌아온 정광훈 고문 ⓒ정광훈

영원한 혁명아(革命兒), 정광훈

정광훈 고문은 진보진영의 ‘원로’였지만, 그 누구보다 새로운 것을 사랑했던 청년이었다.

정 고문은 ‘미래’나 ‘꿈’, ‘행복’, ‘축제’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. 정 고문은 “모든 개인과 조직은 혁명을 통해서만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”고 역설했다.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비정규 문제나 청년들의 취직 문제는 ‘사회 변혁’ 없이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.

또 정 고문에게는 ‘책을 많이 읽는 사람’이라는 말이 꼬리처럼 붙어 다녔다. 이수호 민주노총 전 위원장은 정 고문을 “항상 무겁고 두꺼운 책을 읽는 분”이라고 말했다. 그러나 그는 책장에 꽂힌 책을 다시 읽는 사람이 아니었다. 새로 나온 좋은 책이 많은 데 왜 아는 책을 또 읽겠느냐는 것이다.

정 고문이 해남군 마산면에 짓고 있던 민중학교는 그래서 그의 평생의 염원이었다. 민중학교를 통해 농민과 청년을 ‘의식화’하고, 이를 통해 ‘혁명의 종자’를 만들겠다는 게 그의 꿈이었다. 그가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책의 가제는 ‘혁명의 축제에 초대합니다’였다. 꿈이 있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마중 나온다는 확신, 그것이 그를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하는 이유다.

이정무 기자 jmlee@vop.co.kr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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